경주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 역사 탐방
문무왕 674년,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궁궐도 커지게 되어 신라 왕궁의 별궁이며,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안압지 남쪽에 신라 궁인 월성이 있어 이곳까지 자연스럽게 커진 것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궁 안의 못'으로만 기록되었다. 1980년대‘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본래 이름은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월지'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묵객들이 연못을 보며‘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고 그 때부터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게 되었다.
안압지를 볼 때 주목할 만한 것은,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총 둘레 1000m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신라인들의 세련된 창의성이 돋보이며, 못 안에는 동양의 신선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섬 세 개와 열두 봉우리를 만들었고,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 장치나 배수구 시설 또한 교묘하고 세심하다.
또한, 신라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기와류, 화려한 금속 공예품들도 주목할 만하지만, 나무배와 나무로 만든 각종 건축 부자재, 나무편을 얇게 깎아 글을 기록한 목간 등도 매우 귀중한 생활 유물이다.
이 곳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만 무려 3만여 점으로, 왕실과 귀족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였던 실생활용품이 대부분인데,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 700여 점을 선별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하고 있어 단일 유적지인 안압지에서 얼마나 대량으로 유물이 출토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보문단지
보문호를 중심으로 하는 보문관광단지는 주변지역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고급호텔과 콘도, 온천, 골프장, 야외공연장, 놀이시설 등 각종 문화레저시설을 두루 갖춘 국제적인 관광단지이다.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국보 제31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제작시기 신라시대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때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2]의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 높이는 9.17미터[4]로 바탕의 지름은 5.17미터, 상층부의 지름은 2.5미터이다. 2미터에서 4미터의 고려와 조선시대의 현존 천문대보다 큰 규모이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센티미터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등록일 : 2014-11-29조회 : 2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