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채널e] 인천고교야구의 추억
인천은 개항지로서 그 당시 모든 문물이 인천항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 야구가 가장 먼저 인천에 보급되었음을 짐작할수가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인천야구는 항일독립운동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인천야구의 모태가 되는 한용단과 일본팀이 격돌하던 웃터골은 깃발없는 '독립만세'의 장이었다.
일장기가 내려진 광복후에도 인천야구는 그 정신을 잊지않고 한국야구의 한복판에 우뚝섰다.
특히 1950년대에 인천고교야구는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동산고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의 청룡기 대회를 모두 우승, 3연패함으로서 영구적인 청룡기를 소장하는 유일무이한 학교가 되었다.
이때 재미있는 사실은 동산고의 3연패 바로 전에 인천고가 청룡기 대회를 2연패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950년대 한국고교야구는 인천의 독무대라 할수 있다.
1960년대 인천고교야구는 간간히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특유의 저력을 상실해가며 각종대회에서 현저히 성적부진향상을 보인 시대이다. 특히 1969년부터 시작된 침체는 1970년대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1970년대는 전국고교야구의 춘추전국시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인천은 준우승 전문도시의 오명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 인천고교야구는 다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이후 동산고의 약진은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초고교급 투수라 불리우던 정민태, 위재영이라는 투수로 6년간의 동산고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절 인천에는 또 하나의 야구부가 창단되었는데 바로 인천체고이다. 여기서 결코 웃지못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자.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인천고교야구는 꾸준한 4강이상 진출로 아직도 구도도시 인천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05년은 인천고교야구의 제2의 르네상스였다. 인천고는 한국야구 100주년기념 최우수 야구대회 우승, 동산고는 제60회 청룡기대회 우승으로 야구최강도시를 입증시켰다.
또한 동산고의 류현진, 아니 LA다저스의 류현진으로 대표되는 인천야구의 아이콘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교야구는 프로야구의 인기에 밀려 침체기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 현재 고교야구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고철호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보자
현재 고교야구는 전환기에 서있다. 2011년부터 도입된 주말리그제에 따라 운동과 공부를 병행함으로서 엘리트체육에서 벗어난 인간중심의 체육으로 변화발전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도 구도 도시 인천답게 인천고교야구의 건승을 기원해 본다.
등록일 : 2015-01-01조회 : 2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