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 또 다른 이민 (1600명 입양인의 아버지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전 원장)
- 제목 : 해외입양 또 다른 이민
(1600명 입양인의 아버지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 장소 :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도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광역시 부평구 성 원선시오의 집,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
- 일시 : 2016년 10월 ~ 2017년 2월
(내레이션)
한국전쟁 직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많은 고아들을 품은 분이 있습니다.
올해로 여든 여덟,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으로 계셨던 서재송 씨입니다.
지난해 10월 8일 토요일, 인천 월미도에 위치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또 다른 이민 해외 입양이라는 주제로 50년간 해외 입양인들과 함께한 삶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인터뷰 -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
이번에 마련한 입양전시는 이들과는 또 다른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분들은 어린 시절에 본인들이 인지도 하지 못한 채 타국에 가서 성장하게 된 남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는 분들인데요.
현재 22만 명 정도로 저희가 추산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분들도 비록 자발적인 이민은 아니지만 재외 동포의 일원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자 기획된 전시입니다.
(내레이션)
강연에서는 살아온 이야기들과 어려웠던 점 입양인들에 대한 스토리들을 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기는 아쉬워 이 강연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듣고자 서재송 씨를 찾아갔습니다.
인천항 여객터미널에서 1시간 반의 뱃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덕적도.
이곳이 바로 서재송 씨가 입양인들과의 삶을 시작한 곳입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리포터 :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재송 : 정말 우리 6.25전쟁 직후 참 어려운 시절이었고, 꼭 6.25 전쟁만으로 고아가 발생한 것은 아니고 병으로 고치지 못하고 사망한... 그런 사고로 생기는 아이들이 발생해서 시작이 되었는데...
(내레이션)
서재송 씨가 입양인들을 돌보기 시작한 때는 66년부터였습니다.
바로 베네딕트 즈웨버, 한국이름으로 최분도 신부를 만나게 된 때였습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서재송 : 그 때 최분도 신부라는 분이 연평도 본당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는데 본인이 답사하러 여기 왔다가 내가 그 교회 짓는 곳에 갔는데 거기에 예쁜 외국 신부님이 오셨더라구요.
내가 어쩐 일이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앞으로 연평도 본당 신부로 부임하게 되는데 여기 한번 사전 답사하러 왔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그 분이 연평도 본당 신부로 오게 되면서 앞으로 자기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했는데, 내가 이제 승낙을 안 하고 아마 그 때 6개월인가 9개월인가 대답을 안 하고 있다가, (면장에게) 같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니까 (면장이) 본인이 해야지 면장이 하라 하지 마라 하겠느냐... 상의해서 해라... 근데 하도 부탁을 하기 때문에 그 때 면을 그만두고 최분도 신부님이랑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여기서부터 시작한 게 성가정의 집이라고 해서 신부님 고향인 미국에 입양보내기 시작한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에요.
(내레이션)
이렇게 시작된 성가정의 집은 20년간 운영되다가 86년 부평에 위치한 성 원선시오의 집과 통합됩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서재송 : 81년도에 우리가 완전히 부평으로 가서 그 때 정식으로 (성원시오의 집) 거기를 인수하고 직원들 문제 있던 것들 해결하고...
그래서 그 때에는 혼혈 아이들이 120명, 처음에는 우리 한국 아이들을 위해서 시작했던 것이 한국아이들은 적어지고, 혼혈 아이들이 많아져서 혼혈 아이들이 많을 때는 120명 정도 됐는데...
(내레이션)
그때부터 성 원선시오의 집을 거쳐 간 입양인들은 무려 1600명에 이릅니다.
서재송씨는 다른 기관들과 다르게 외국으로 입양 보낸 아이들의 자료들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사후관리로 최분도 신부와 함께 미국에 방문해 입양인들을 만나왔습니다. 인천 명예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한 최분도 신부는 서재송씨와 함께 입양인들을 위해 열의를 다해왔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이 옷들은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해외입양의 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서재송 : 그 뉴욕에 스테이트 아일랜드라고 롱아일랜드 가기 전에 뉴저지에서 다리 하나 건너가면 섬으로 된 뉴욕이 있어요.
(입양인 중 한 명) 걔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 그 어머니가 본인도 좋은 회사에 다니고 하니까, 너는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하니까 앞으로 무역계통으로 진학을 하면 장래에 좋을 거다. 대학교 갈 때 그런 학과를 가라고 권했는데 자기는 싫다고 했어요. 사회 복지과로 가겠다고...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한국에 있을 때 그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에게 해주는 것을 볼 때, 너무나 잘해주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줬기 때문에, 자기도 성인이 되면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 때 그렇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자기도 봉사하기 위해서 사회복지 계통으로 나갔어요. 장애인들 도와주는 계통으로...
또 하나는 스티브라고 흑인 혼혈아이인데 일곱 살 때 뇌성마비를 앓아가지고... 이중 장애자에요. 눈도 안보이고 걷지도 못해서 휠체어 타고 다니는데, 그 미국 대사관의 여자 영사랑 같이 우리가 현지 방문을 해서 그의 환경을 보니까 하도 딱하니까 미국은 이중 장애자가 들어가게 비자를 발급 안 해 줬어요. 그런데 (영사가) 비자를 발급해줘서 미국에 보냈는데 작년에 가서 만나보고 왔는데 오랜만에 갔는데 눈도 안 보이는데 목소리만 듣고 알아보는 거에요. 가서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레이션)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해외 입양인들은 성인이 되고 조국인 한국으로 가족을 찾으러 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쓴 책들과 이야기들은 하나 둘씩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많은 입양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서재송씨와 함께 한국을 돌아보는 행사도 가졌습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서재송 : 배려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자기만을 생각하는데... 참 우리 사회라는 게 서로 돕고 배려하는 데에 사회가 이루어지는데 너무 자기만을 생각한다는 것... 사람의 존엄성이라든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든지 이런 게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워요)
(내레이션)
현재 서재송 씨는 원장직을 내려놓았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많은 입양인들이 서재송 씨를 보러 찾아옵니다.
이렇게 귀한 삶을 우리 지금 세대는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포용하고 배려하는 것들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서재송 씨는 깊은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전 원장)
리포터 : 원장님이 아이들을 데려와 키우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서재송 부인 : 아이고 힘든 건 제가 제일 힘들었죠. 이 양반이 뭐가 힘들어요. 내가 밥해주고 그러니 누가 돈을 대줘야지 아이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시골에서 어머니하고 동생네가 살았거든요. 채소 같은 거 보내주고 동생이 갖고 오고 그래도 애들 방문하러 자기네 집보다도 잘해 먹는다고 칭찬하고 그랬어요.
리포터 : 두 분 중에 프로포즈는 누가 하셨나요?
서재송 부인 : 이 양반이 먼저 했지 뭐...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에필로그)
1600명 입양인의 아버지로서 평생을 살아오신 서재송 원장님의 삶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민리포터 문경숙 입니다.
- 제작 : 문경숙 남구시민리포터
등록일 : 2017-03-02조회 : 3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