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북콘서트_신현수 인천 사람과 문화 이사장_인천에 살기 위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신현수시인의 소개를 해야 되는데 저는 이 시로 대신 하려고 합니다. 제가 먼저 시낭송 하나 올려드리겠습니다.
[인천에 살기 위하여]
플레이 캠퍼스 장한섬의 안내를 받아
중구 동구 투어를
인천역에서 시작하는데
동인천역은 인천의 서쪽에 있고,
제물포역은 항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도원역은 일제강점기
근처에 있던 일본인 농장의 이름이고,
새로 생긴 수인선 송도역에 내리면
그곳은 송도가 아니니,
참 바꿀 일 많은 인천이다.
신포시장으로 들어가니
2대째 떡 장사를 하고 있는
이종복아우가 보고 싶은데
갑자기 떡집을 아들에게 물려줄려나 궁금하고,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시골 부평에서
도시 인천까지
화려한 외출을 감행하여
손바닥보다 더 큰 튀김을 먹던 생각이 나고,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어 가던 우무 생각이 나고,
눈물 나게 맵던 쫄면이 생각나고,
신포시장 안의 칼국수 골목은
한때 인천의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던 골목이었지만
이제 딱 두 집 남아 있고,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짜장면 박물관에 들렀다가
옛날에 배를 대던 골목으로 내려가니,
아, 차이나타운이 옛날에는 배를 대던 바닷가였지,
그래서 차이나타운에 밴댕이 횟집이 많은 거지.
김구선생이 옥살이를 하던 곳
인천감리서 터로 가니
감리서 터는 말할 것도 없고
곽낙원여사가 머물며 아들 밥 해 주던 집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싹 밀어버린 일이 못내 아쉽고,
답동 성당에 올라갔다가
답동의 답은 ‘논답자’일 텐데
왜 언덕 꼭대기 동네이름을 답동이라고 했을까 궁금하고,
경동목욕탕을 지나갔는데
요금이 3천원이라.
아니 목욕탕요금이 3천원이라니
인천에 아직도 이런 착한 곳이 남아 있다니 고맙고,
내리는 비도 피할 겸
애관극장에 들어가 오줌을 싸다 생각하니
맞다, 40년 전에 엑소시스트 보다가
너무 역겨워
나와서 그만 먹은 것 다 토했던 바로 그 화장실이다.
아, 벌써 40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그 시절 그 극장이
아직도 이름도 안 바뀐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고 고마운 애관극장을 관통해
신신예식장으로 올라가니
아니 효인요양병원으로
언제 바뀌었지?
신신예식장은
제고 그룹사운드 레인보우 형들이 공연했던 곳,
이제 예식장 이름은
주차장이름에만 남아 있고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데
노인들의 수명은 날로 길어지니
예식장이 요양원으로 바뀐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혹시 지금 요양원 계신 분 중에
신신예식장에서 결혼한 분은 없나?
다소 엉뚱한 궁금증이 들고,
용우물로 내려가니
용우물 주변이 작은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우현 고유섭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놓았고
동인천역 앞 도로 이름도 우현로이니
관에서 잘하는 일도 더러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대학시절 다니던
호프집 마음과 마음, 하이델베르크는 아직도 정정하고,
친구와 다니던 음악감상실 자리는
어디인지 잘 모르겠고,
동인천역은 도대체 언제 해결되려는지
볼 때마다 열통 터지고
내년이 아시안게임이라는데
그때까지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어려울 것 같고,
대한서림 1, 2층은
결국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3층으로 쫓겨 올려갔고,
동인천 학생문화회관이
왜 이곳에 세워지게 됐는지를 알리는
추모비와 안내판은
꼭 그렇게 후미진 곳에 숨겨놓아야 했는지 모르겠고,
인현동화재참사로
꽃다운 청소년 무려 52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졌던 게
1999년 10월이니
벌써 14년 전 일이고,
아직도 그날의 참사를 잊지 못하는
친구들이 갖다놓은 꽃다발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고 있었고,
참 멋대가리 없이 만들어 놓은 동인천 북부역사를 빠져나와
중앙시장으로 가니
그렇구나, 아 옛날에 결혼반지를 맞췄던 시장이구나,
중앙시장 옆 양키시장에는
물건을 팔려고 나왔는지
사람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 모를
할머니들이 석고처럼 앉아있는데
양키시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여전히 방치된 오성극장 자리를 지나
미림극장으로 가니
최근 실버전용극장으로 다시 태어나 다행인데
좌석안내도를 보니 좌석이 이층이다.
그래 맞아, 옛날에는 극장이 이층이었지?
자이언트, 로마의 휴일, 아,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나비 날다'책방을 지나
배다리사진관으로 올라가니
사진가 이영욱선생이 이상봉관장과 인사를 시켜줬고
배다리 터줏대감
아벨서점의 곽현숙선생은
무슨 일이 됐든
일 안 하고 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스페이스 빔은
원래는 소성주를 만들던 양조장 자리
민운기 아우가 구월동에서 짐을 싸들고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민운기 아우의 스페이스 빔이 있어
이제 배다리는 더 이상 빈공간이 아닌데
빔은 비운다는 뜻이니
비움으로 채운다?
뭔가 심오한 역설이 있는 듯하고
비도 오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곳을 다녔지만
알아야 사랑하는 거지,
계속, 인천에 살기 위하여
그럼 선생님의 자랑을 동민군이 먼저 해볼까요? 흉봐도 돼요.
네. 일단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욕을 많이 하시고, 다 저희를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겠지만 욕해도 항상 감사하고요. 저희 문학하고 화법과 작문이란 과목을 가르침 받고 있는데 너무 잘 가르쳐주셔서 좋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욕을 해도 잘 가르치면 되는 거잖아요. 잘 가르친다고 했으니까. 칭찬도 하고. 더 할 말 없죠?
네.
그럼 우리 윤하늘군, 먼저 흉보고 나중에 칭찬을 하면 선생님이 기억을 잘 못해요. 흉보고 나중에 칭찬하기.
신현수선생님께서는. 저는 흉 안봅니다. 항상 꾸준하신 것 같아요. 아침에 제일 먼저 반에 들어오시고 항상 신문을 읽으세요. 그리고.
칭찬하려니까 칭찬할 게 없잖아요. 그냥 흉을 보세요.
그리고.
진짜 칭찬할게 없나 보다. 끝?
네.
다음부터 아이들이 선생님 자랑질을 좀 할 수 있게 욕을 좀 그만하시고, 주로 어떤 욕을 하시나요?
시벨롬이라고.
리얼하다. 또. 재밌는데요.
개만도 못한 새끼가
아니 어떻게 제자들한테 개만도 못한 새끼라고. 우리 앞에서만 굉장히 멋진 척을 하시더니. 이렇게. 이러시면 되겠어요? 빨리 우리 반장, 부반장한테 용서를 구하십시요.
사과할께.
네. 사과 받아주실 거죠? 안받아 주면 또 어쩔거야. 그죠? 네. 인사하고 들어가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니 요새 학생들은 어쩜 이렇게 다 잘생기고, 잘났고, 키도 큰지 어제 사진 보니까 선생님이 학생들 반토막이더라구요. 그 친구가 있어 농구에 이겼다고 또 자랑질을 하셨는데, 앉아만 있어도 굉장히 뿌듯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얘기하시다 보니까 아버지얘기가 나와서, 시집 중에 ‘아버지’ 라는 시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초대한 신철 작가님. 굉장히 유명한 화가분이신데 오늘 시간 어렵게 빼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까 먼저 오셔서 제가 얘기를 나누다가 '아버지’ 시로 바꾸고 싶다는 서로의 얘기가 있어서 그 시를 준비를 했습니다. 신철 작가님 잠시 모시겠습니다.
신철님은 화가이시고요. 동화 같은 소녀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고, 심성도 그러하시고, 최근에 우정본부 관제엽서에 형님 그림이 들어가서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우리 같은 사람은 엄두도 잘 못 내고요. 형님으로 제가 잘 모시고 있고. 오늘 대전에서 전시도 있는데 제가, 아우가 이런 행사를 한다고 어렵게 오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양화가 신철입니다. 우리가 술자석에서 이야기할 때 신현수선생하고는 혈연, 학연, 지연도 없이 그냥 인연입니다.
[아버지 8_순대국]
오랫만에 혼자 순대국을 먹으며 갑자기 아버지 생각났다.
눈 많이 오던 날 아버지는 아들 데리고 공주에 갔다.
여인숙에 들고 나는 심심해 아버지를 남겨두고
혼자 극장에서 저질의 영화를 보고 들어가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잤다.
눈 그치고 새벽 미끄러운 길 순대국집을 찾아 아버지와 함께 순대국을 먹고
나는 사범대학에 가 시험을 보고 아버지는 까만 색 오바를 입고 밖에서 떨며 기다렸다.
아버지는 그 후 공장에서 빵을 먹으며
마당에 앉아 농성을 하기도 하고 높은 혈압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차던 중고시계 몇 달 찬후 잃어버렸고
아버지 입던 잠바 사십구재 때 절에서 태웠고 아버지 입던 까만 오바
지금도 아내와 내가 사는 방에 걸려 있다.
아내는 오바를 보면 무섭다고도 하고 우리를 지키는 수호신같다고도 한다.
도대체 나는 아버지 생전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던가.
나도 아들 생기면 눈 오는 날 대학시험장에 데리고 가 꼭 순대국을 사주고 싶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라고 잘 아는데, 우리 신현수선생님은 어떤 아버지이신 것 같으세요?
애들이 싫어하는 아버지겠죠.
순대국밥 사주셨어요?
집에 제가 잘 못해서, 집에 잘 안 들어가니까, 평생 저만. 애들 키우는데 공헌을 한 바가 별로 없어서 저를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아버지’ 시를 읽으면서 왠지 뭉클했던 느낌도 들고. 신철선생님은 왜 이 시를 고르셨어요?
5월이어서
5월이어서. 5월은 역시 여러분들 다 아시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 그래서 아까 시를 이것을 딱 고르셔서. 아~ 그러면 BG음악은 ‘부모’를 깔아야 되겠다 싶어서 ‘부모’를 갑자기 준비했습니다. 잠깐 음악 들으시면서 내 아버지 생각을 잠깐 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좋죠. 피아노로 이렇게 ‘부모’가 흘러나오니까.
신현수선생님한테 지금 말을 시키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라서 제가 더 떠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아빠가 순대국밥을 자주 사주셨어요. 저는 숭의운동장 뒤에 있는 이화순대, 시정순대를 자주 갔었는데 그 기억이 잠깐 떠올랐었습니다. 아버지얘기를 자꾸 하다 보니까 신현수선생님 눈물이 찔끔찔끔 옆에서 흐르는 것 같아서 이제 아버지 얘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선생님 마이크를 잡으세요. 자꾸 내려놓지 마시고. 무거우신가요?
제가 보니까 우리 신현수선생님은 학생들, 남학생들한테는 굉장히 욕도 하고 막 이런 선생님 같은데 여학생들한테는 굉장히 아버지 같은. 아니에요? 아니였나요?
우리 두 분만 한번 모셔볼까요? 대천여고 제자 두 분만 올라와 주시겠어요.
저는, 85년도에 저희 담임이셨어요. 대천여고. 아마 선생님은 저희들이 첫 여고 제자신 것 같아요. 같이 늙어간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우리 여학생들한테도 욕 했답니다.
그때는 통했어요. 그때는 선생님 몇 살이셨어요?
20대 후반. 그때 선생님은 너무 인기 많았어요. 저희 여학생들한테. 어린왕자로 불리어지고
그냥 젊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작으시잖아요. 귀여우셨고요. 별명도 우리가 어린왕자라고 하니까, 다들 거기에 포커스를 맞춰서 저희가 너무 귀엽게 봐드린 게 아닌가.
그럼 어디서 오셨나요? 어린왕자께서는. 소혹성 B612호 거기서 오신 거에요? 근데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린왕자신데요. 그 당시 선생님이 장미꽃에 물을 주고 또 훌쩍 떠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선생님이요? 글쎄, 삼촌 같으시고, 전 이제까지 학창시절 중에서 선생님이 담임이었을 때, 그때가 가장 즐거웠었던 것 같아요. 저희 반도 우리 여학생들 쾌활하게 잘 지냈고, 추억에 우리의 소중한 선생님으로 남아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제자분 중에서 이은영씨께서, 선생님이 자주 여기서 낭독을 하셨던 시이기도 합니다. ‘밥벌이 지겹지 않음’이라는 시를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밥벌이의 지겹지 않음]
예전엔 아이들과 씨름하고
종일 수업 하는 게 힘들어
딱 며칠만 쉬면 좋겠다고
생각한적 많았지만
나이 든 지금은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당장 내일부터 학교에 나올 수 없다면
그래서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자식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먹고 살 수도 없고
후배들에게 술을 살 수도 없고
스리랑카의 따루시카디브안자리에게
안정된 급식과 학업에 필요한 학용품
일상생활에 필요한 옷을 사줄 수 없고
어려울 때 손잡아 주는 친구
상조회에 회비를 낼 수 없고
매일 아침 쿠퍼스를 날라다주는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날 수 없고
내가 속한 여러 단체의 회비를 낼 수 없고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낼 수 없고
뭐가 보장되는지도 잘 모르지만
보험금을 낼 수 없다
정말 당장 내일부터 학교에 나올 수 없다면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게 없다
나이 든다는 것은
밥벌이의 엄정함을 깨닫는 것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실은 밥벌이였다는 걸 깨달으니
이제 대체로 모든 게 견딜만하다
전날 술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다음날 일찍 벌떡벌떡 일어나야 하는 내가
하나도 가엽지 않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 삶이 더 이상 의미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나이 든다는 것은
세상에 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 나이 든다는 것은
밥벌이가 하나도 지겹지 않은 것
이 시는 이은영님이 직접 고르셨나요? 선생님이.
계기는 처음에 저희가 20~30년이 지나서, 다 여고를 졸업하고 아줌마들이 돼서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뭔가 뜻 깊은 이벤트를 하자. 그래서 시를 하나 낭독해드리면 좋겠다, 선생님 시를. 그래서 하나 골라달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이 시를 골라주셨어요. 그래서 그 계기를 통해서 선생님도. 제가 사실은, 조금 아까 시인이라 하셨는데 저 일반 직장인이거든요. 병원에서 일을 하는 의학도인데 선생님 때문에 뒤늦게 이렇게 문학도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때 선생님이 골라주신 시로 이렇게 인연을 맺어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있게 된 것 같아요.
[김영원]
너희들 졸업식날 아침,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설때는 사실 식에 참석하려고 했었어.
그날도 비가 와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다
막상 학교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까 또 마음이 약해졌어.
지금 너희들의 담임이 어색해 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아니 실은 내가 더 불편했기 때문일거야.
졸업식장 어디에 서 있어야 하나 선생들 서 있는 자리에?
아니면 학부모들 자리에? 교장을 만나면 뭐라고 하지?
결국 지회 회보를 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핑계로 사무실에 그냥 있고 말았지.
너희들과 어떻게 헤어졌지?
도에서 온 장학사와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문답서를 꾸민 며칠 후
교장실에서 직위해제 통지서를 받고 교실에 들어가
내가 한 말은 고작 '저녁 먹고 자습해라'였지
(학교를 쫓겨나는 마당에 자습이 그렇게도 중요했는지).
그게 내가 너희에게 한 마지막 말인 것 같다.
그날 이후 교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
흔한 마지막 수업도 못하고.
나처럼 병신같이 학교를 쫓겨난 선생이 또 있을까.
출근 투쟁 때도 교무실에만 앉아 있다 그냥 왔고,
엿이라도 사 주었어야 할 너희 입시 전날은 경찰서에 있었지.
3학년 8반의 세 달쯤 담임이었던 나는 너희에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반 전체가 모의고사를 거부한 채 답안지에 징계 반대라고 썼던 너희들에게,
운동장에 모여 농성을 하고, 그 일로 졸업할 때까지 핍박을 받고,
졸업후에 대한 아무 준비도 없이
학교를 떠난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나는 무엇일까
그날 늦게 술이 잔뜩취해 인사불성인 채로 사무실 밑에서
"신현수 개새끼 나와, 니가 우리에게 해 준 게 뭐야,
씨발놈 뭐 해 준 게 있냔 말야!"
비를 맞으며 울면서 욕을 했을 때
아, 너희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더욱 큰 사랑이라는 건 내 자존심만 만족시키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을까.
내가 나만 너무 사랑함으로,
극단의 이기주의로, 알량한 내 양심 한 조각 지키기 위하여
너희들 작은 가슴에 평생 빼지 못할 못을 박은 건 아닐까.
우리 어느 하늘 아래 살더라도 죽지만 말고,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가라.
제가 이 '나는 좌파가 아니다' 책을 보면 선생님의 해직교사시절 때 얘기가 은근 많이 나옵니다. 우리 하작가님은 지금 이 ‘김영원’ 시를 직접 고르셨어요? 아니면.
선생님께 여쭤봤죠. 선생님 낭독을 뭘 할까요? 했더니 ‘김영원’해~ 이러시더라구요. 근데 제가 책이 나오고 얼마 안 있어서 이런 저자와의 대화의 자리를 한번 했었는데요. 그때 고등학생 운동했던 친구들을 좀 모아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북콘서트 형식이었어요. 근데 거기서 그때 당시의 사진자료들이나 이런 것들도 좀 보여주고, 이런 것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선생님이 바로 그 타임라인에 ‘김영원’ 시를 그냥 던져놓고 도망 가신 거에요. 그날 와서 그 시를 읽는데 제가 최근에 시를 보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 데 그냥 펑펑 울게 되더라고요. 선생님이 왜 이 시를 던져놓고 가셨는지도 알 것 같고, 또 제가 산문처럼 읽었지만 별로 운율도 없고 시 같지는 않지 않습니까?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을 울리나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공동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같고, 또 선생님이 오늘 이 시를 읽어라 한 것은 일종에 아까 학생들이 와서 선생님이 욕을 한다고 하셨는데 꺼꾸로 저한테 한번 기회를 주신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하작가님 책을 다 읽고 나서, 인제 콘티를 좀 짜보려고 어떤 시를 읽으실 건가요? 하고 연락을 했더니 ‘김영원’ 읽으라셨어요. 하시더라고요. 근데 딱 그 시를 보는 순간 아! 하작가님하고 너무 잘 맞구나. 그리고 제가 한번 다시 읽으면서 이 욕을 어떻게 하지? 저는 살짝 고민을 했는데 아까 그 부분에서 더 목소리가 커지고 리얼했던 것 여러분 들으셨었나요? 선생님이 아마 가장 본인의 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시를 제일 아끼는 딸 같은, 동생 같은 하작가님께 부탁을 드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거죠? 옆에서 울고 싶으셔서. 또 말 안 하신다.
죄송합니다. 제 시로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것도 시냐 일기냐.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도 첫 번째 시집 ‘서산가는 길’이라는 시집이 있는데 보시면 알겠지만 되게 어려워요. 다 그런 건 아니고 앞에, 전반부에 저도 잘 모르는 소리를 많이 하고, 이상한 비유와 상징 이런 걸 찾기 위해서 밤새워 고민했었는데, 학교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갑자기 어느 날 이런 깨달음. ‘이게 뭔 소용이 있지?’ 그래서 바꿨어요. 소위 로맨티시즘에서 리얼리즘으로 그 어떤 전환이라고 할까?
저는 시의 공적인 목적은 감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동은 이해에서 오는 거고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한지 알아야 감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우리 어머니도 알아듣는 시를 쓰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데 그 경계가 모호하긴 하죠. 너무하면 풀어지기도 하고, 경계가 모호한데.
여하튼 시 잘 쓴다는 소리는 많이 못 들었는데, 많이 울었다는 소리는 제가 많이 들었어요. 전철 안에서 울었다는 둥, 사람들이 쳐다봐서 창피했다는 둥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제가 울면서 썼기 때문에 아마 그런 거라 생각하고요. 전 문학은 슬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작가가 울지 않는 시는 독자도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저는 또 시를 집에 많이 비유를 해왔는데, 집은 누구나 집인지 아닌지 다 알잖아요. 쉬워야 되고 집은 또 따뜻하고 바람 같은 것들을 막아주는 이런 따뜻함, 이런 것들이 있어야 되고. 또 집은 벽돌로 집을 짓는 거니까 집을 짓기 위한 적당한 벽돌. 벽돌이 언어라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언어로 지은 누구나 알기 쉬운 집이다, 그게 문학이다, 시다 이렇게 저는 생각을 해왔어요.
제가 적당한 언어인지 그런 거는 잘 모르겠는데, 여하튼 제 시는 막판에 마지막 두줄, 세 줄에 감동이. 저는 마지막 줄은 굉장히 많이 고민을 하는데 막판에 뒤통수 후려치는 뭐 이런 감동이 없으면 제 시는 실패한 거고 그런 게 좀 있으면 뭐 좀 볼만한 그런 시 인데.
문단에 김광규선생님이라고 계세요. 제가 제목을 패러디 해서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라는 시를 계속 쓰고 있는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를 쓴 김광규 선생님이 계신데, 김광규선생님을 제가 좀 흉내내고 있어요. 이 시에서. 산문처럼 이렇게 풀어 쓰는데 마지막에 어떤 진한 감동이 있는 그런 시를 쓸려고 하고요. 이 시도 시인지 산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거의 그대로 영화를 보는 것 같잖아요.
작년 비 많이 맞고 이렇게 와서 저한테 욕을 했을 때 이런 얘기를 어떤 비유와 상징으로 어떤 이런 장면을 표현할까 도저히 답이 안 나오거든요. 저는 그냥 그런 상황을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제 시들이 대부분 다 그래요. 마치 제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그런 느낌들일 거에요. 그래서 ‘김영원’ 이라는 시도 그렇고 대부분 시들이 그렇습니다. 명희한테 이 시를 읽어달라고 했는데 아까 걔도 거듭 얘기 했지만, 그 당시 제가 저 혼자 잘 먹거나 잘 살자고 그런 행동과 그런 결정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를 사랑했던 제자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었고, 소위 전교조로 대표되는 교육운동 집단들이 여전히 그 제자들의 그룹에 대해서 지금 너무 돌보지 않고 있다. 거의. 전교조 해직된, 저처럼 복직도 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때 아무 준비도 없이 사회에 내팽개쳐졌던 내 제자들은 40대 중반이 되는 데,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러다 명희를 만나서 그때 뭐 그런 용서를 구하고 싶고. 앞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상의해서 좀 더 같이 모임을 해볼 수 있는지, 아님 어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제가 그 조직의 대표는 아니지만 좀 고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무 엄마]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황당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아직 아무에게도,
심지어 애들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이 있다.
야자 감독을 마치고
밤 10시 무렵 퇴근을 하던 어느 날
아파트 입구를 지나가는데
SUV자동차가 왼쪽으로 꺾어 들어오더니
막무가내로 오른쪽 발등을 타고 올랐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차 주인이 차에서 내렸다.
술 냄새가 났고
아마도 나를 못 본 모양이었다.
일어나 걸어보니 다행히 걸을만해서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명함만 한 장 받고 그냥 보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이곳저곳 쑤시기는 했지만
약간 절뚝이며 출근은 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을까?
병원에 가자고 해야 했을까?
내 행위도 용서에 속할까?
사실 사고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경찰이나 병원이 아니라
내일과 이번 주와 이번 달에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었다.
마치 일중독자처럼.
그 후로 차만 보며 무서워
먼저 슬슬 피하게 됐고
길을 건널 때마다 몇 번이고 좌우를 돌아봤다.
차에 치어 쓰러진 입구를 지날 때마다
여전히 발등이 아팠다.
고작 발등을 타넘은 것 때문에
자동차가 이리 두려운데
지난 봄날 생때같은 자식이
시커먼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빠져죽는 걸
두 눈 뜨고 하루 종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정무 엄마는,
아, 평생을 어찌 살아갈까?
- <작가들> 2015년 봄호
등록일 : 2015-09-10조회 : 4235